본 페이지의 내용은 이번 펀딩의 5권인 [오늘부터 나는 영웅이 되기로 했다]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웹 콘텐츠에 맞게 재배열했습니다. 5권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링크를 눌러 편딩에 참여 해주세요.
박사과정에서 인간의 행동 원리를 탐구하다 보면, 결국 모든 질문은 하나의 뿌리로 향하더군요.
바로 ‘생존’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극심한 관계 스트레스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진화 심리학의 렌즈를 빌려 명리학의 ‘육신(六神)’이라는 개념을 들여다보면 정말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됩니다. 육신은 단순히 사주팔자 속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 우리 DNA에 각인된 아주 오래된 생존 프로그램들의 목록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수십만 년 전,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무리를 지어 살던 시절부터 우리의 뇌에 탑재된 이 프로그램들이 21세기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오작동하며 우리를 괴롭히는지, 그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진화심리학이란!?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핵심 주장은 "현대인의 마음과 행동은 수백만 년에 걸쳐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생존과 번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심리적 적응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와 마음도 눈, 손, 심장처럼 자연선택을 통해 특정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진화 심리학은 다음과 같은 주요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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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 그 특성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과정입니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두려움, 질투, 사랑, 협동심 같은 심리적 특성도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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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기제(Psychological Mechanism): 특정 문제(예: 포식자 피하기, 배우자 찾기)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정보 처리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뱀이나 거미에 대한 보편적인 공포심은 독이 있는 생물을 빠르게 피하도록 도와 생존율을 높였던 심리 기제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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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환경(Ancestral Environment, EEA): 인류의 심리가 주로 형성된 시기인 수렵-채집 사회의 환경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현대 사회가 아닌, 이 조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맞춰져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는 종종 부적응적인 모습(예: 지방과 설탕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보이기도 합니다.
존재감(Presence)
존재감(Charismatic Presence)과 사회적 실존감
강력한 '존재감'은 높은 사회적 지위, 신뢰성, 능력을 외부에 알리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좋은 평판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강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중요한 인물이다', '협력할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런 존재감은 더 많은 자원과 더 나은 배우자를 얻을 기회를 높여주는, 즉 사회적 실존감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지금, 여기에 현존'(Mindful Presence)과 물리적 실존감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능력은 생존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바로 지금' 눈앞에 나타난 포식자를 피하고, '바로 지금' 발견한 과일을 채집하는 능력이 생사를 갈랐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계획에 빠져 있는 개체는 즉각적인 위협이나 기회를 놓치기 쉬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체 감각과 주변 환경에 대한 즉각적이고 집중된 인식 상태, 즉 '현존(presence)'하는 능력은 생존을 위한 핵심적인 심리 도구였습니다.
사회적 존재감(Social presence)
사회적 지위와 평판 (Social Status & Repu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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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나는 집단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 다른 구성원들이 나를 유능하고, 신뢰할 만하며,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가? 를 측정하는 변인입니다. 존중받을 때 느끼는 자부심, 무시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이 변인의 변화를 반영하는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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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적 중요성: 높은 지위와 좋은 평판은 더 나은 자원, 배우자, 협력 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낮은 지위나 나쁜 평판, 특히 집단에서의 추방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가치에 매우 민감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사회적 연결감 및 소속감 (Social Connection & Belo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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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나는 이 집단에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가? 나를 지지하고 도와줄 가족, 친구, 동료가 있는가? 를 측정하는 변인입니다.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과 유대감, 그리고 고립되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이 변인과 관련된 핵심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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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적 중요성: 외로움은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사회적 고통' 신호입니다. 이는 신체적 고통만큼이나 강력하게 작동하여, 개인이 어떻게든 집단과의 연결을 회복하도록 촉구합니다. 집단으로부터의 보호와 협력은 생존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짝짓기 및 번식 가치 (Mating & Reproductive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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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나는 이성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가? 나의 번식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를 가늠하는 변인입니다.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 사랑의 감정, 질투, 잠재적 경쟁자에 대한 경계심 등이 이 변인과 관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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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적 중요성: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것은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배우자 가치(mate value)'를 높이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관계를 유지하려는 심리 기제는 매우 정교하게 발달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관계 스트레스에 취약한지부터 짚어봐야 합니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철저한 사회적 동물로 봅니다. 과거 수렵 채집 사회에서 무리로부터의 고립은 곧 죽음을 의미했죠. 맹수나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사회적 배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뇌는 사회적 위협(무시, 고립, 평판 하락)을 물리적 위협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위험으로 인식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는 건, 마치 눈앞에 칼을 든 강도가 나타났을 때와 뇌의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위협이 대부분 실체가 없는 ‘가상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상사의 무심한 한마디를 곱씹으며 ‘나는 곧 해고될 거야’라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병들게 하는 가상 관계이자 관계 스트레스의 본질이죠. 명리학의 육신은 바로 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가상 관계의 시나리오, 즉 내 안에서 나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통제하며 때로는 위로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심리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격국
‘격국’이란 환경에 의해 체화된 생존 전략
자연스럽게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아비투스는 특정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무의식적으로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행동과 사고의 습관을 의미하는데, 이는 ‘격국’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특정 지역 출신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억양이나 생활 방식처럼, 아비투스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발현됩니다. 명리학의 격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태어난 월지라는 환경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 성공 방식, 소통 문법 등을 담고 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을 것이고, 그 시대의 격국은 성실함과 순응을 높게 평가했을 겁니다.
이는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 ‘모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내면화하고, 격국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이 개인에게 가장 잘 맞춰 입혀준 옷과 같습니다.
결국 격국은 내가 살아온 세상의 역사와 문화가 내 몸에 압축적으로 새겨진 결과물입니다. 이는 생존에 매우 유리한 전략이었을 겁니다.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서 인정받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격국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유물사관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동시에 개인을 특정 틀 안에 가두는 강력한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한번 몸에 새겨진 아비투스, 즉 격국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었던 것이, 시대가 바뀐 지금에는 오히려 나의 잠재력을 억압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면의 깊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내 안에 체화된 격국의 목소리와, 변화된 세상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나의 주체적 자아, 즉 ‘일간(日干)’의 목소리가 충돌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개념 (Concept) | 핵심 의미 (Core Meaning) |
육신 (Yuksin) | 내면의 다양한 관계 심리 및 목소리 |
격국 (Gyeokguk) |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 사회적 쓰임 |
월지 (Wolji) | 내가 태어난 환경, 시대적 배경 |
아비투스 (Habitus) | 환경에 의해 체화된 무의식적 성향과 습관 |
집단 무의식 |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보편적, 무의식적 정신 구조 |
우리는 격국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틀 앞에서 무력하게 순응해야만 할까요?
명리학을 오랫동안 스터디하며 제가 내린 결론은 ‘아니오’입니다. 명리학이 정말 실용적인 학문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로 인해 형성된 격국을 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다양한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라는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서 말이죠. 상생이 내 삶의 이야기가 순리대로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상극은 안정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강력한 동력입니다.
흉凶은 진짜 흉일까?
흉격은 그 이름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을 풍깁니다. 깨지고, 흩어지고, 빼앗기는 등 실패와 불행의 아이콘처럼 여겨지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주에 흉격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크게 낙담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박사과정에서 희생과 제물을 공부하며 생긴 버릇 때문인지,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에 늘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과연 흉격은 그저 망하기만 하는, 피해야 할 불행의 씨앗에 불과한 것일까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서 "희생제의"는 집단 내 갈등과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처벌하거나 추방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집단 내부의 긴장을 완화하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폭력의 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흉격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구조에는 상관견관(傷官見官), 군겁쟁재(群劫爭財), 도식(倒食) 등이 있습니다. 상관견관은 나의 독창성(상관)이 기존의 질서(정관)를 무너뜨리는 모습이고, 군겁쟁재는 나의 소중한 결과물(재성)을 경쟁자(비겁)에게 빼앗기는 구도이며, 도식은 나의 재능(식신)이 엉뚱한 생각(편인)에 의해 엎어지는 현상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순탄치 않은 삶이 그려집니다.
전복顚覆
하지만 이 현상들을 ‘전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다시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전복’이란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드는 행위입니다. 흉격의 삶은 태생적으로 기존 질서, 즉 사회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규정한 아비투스(Habitus)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불합리한 규칙에 순응하기보다 그것을 깨뜨리려는 충동을 느낍니다. 상관견관은 낡은 권위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군겁쟁재는 불공정한 분배 시스템에 대한 투쟁으로, 도식은 쓸모없어 보이는 생각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혁신적인 시도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의正義
흉격의 ‘전복’이 단순한 파괴나 반항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정의(justice)’라는 핵심 가치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란, 보편타당한 윤리적 기준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올바름’에 가깝습니다. 유물사관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회 시스템은 그 시대의 생산 양식과 필요에 의해 구축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기존 시스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됩니다. 바로 이때, 흉격의 인물들이 시대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낡은 시스템의 모순과 균열을 감지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의’라고 믿습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회합(會合) 구조를 가진 사람이 상충(相沖)이라는 시대적 위기를 만났을 때, 그는 그 혼란을 이용하여 낡은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를 독선적이고 무자비한 ‘악당’이라 비난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과감한 결단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흉격의 전복 행위는 개인의 불만 표출이 아니라,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과거의 정의를 무너뜨리고 다가올 미래의 정의를 세우려는 시대적 소명에 가깝습니다.
희생犧牲
이러한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sacrifice)’이 따릅니다. 흉격의 삶이 고단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 속에서 안정을 누리던 이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악당’이 되기로 결심한 흉격의 인물은 ‘배신자’, ‘괴팍한 사람’, ‘사회 부적응자’라는 수많은 비난과 오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안락한 고향과도 같았던 공동체를 등져야 하고(방합과 상충), 나를 키워준 스승이나 부모와도 같은 은인과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육합과 상충). 이는 단순히 관계가 틀어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또한, 가장 큰 희생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일어납니다. 내면의 불안과 싸우고, 성공에 대한 보장 없이 불확실한 길을 걸으며,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내야 합니다. 흉격의 인물은 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신념, 즉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고독한 영웅입니다.